그를 기억하며... 베이스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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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기억하며... 베이스 이인영


한국 성악의 선구자 이인영, 미수기념 렉처 콘서트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폐허가 되고 황무지 같았던 시대에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현해탄을 건너간 소년이 있었다. 겁도 많고 몸도 약했지만 다가오는 어려움이 음악에 대한 그의 의지를 막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뒤로 하고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어렵게 공부하는 후세대 성악가들을 위해서 그의 모든 혼을 쏟았다. 오는 7월 1일 오후 2시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한국 성악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주제로 미수(米壽)기념 음악회를 제자들과 함께 연다. 이인영 교수의 ‘해방 전후 한국 성악의 발자취 및 영향’이라는 주제의 렉처를 시작으로 소프라노 Lilla Lee와 I Maestri(예술감독 양재무)의 연주까지 이어지는 풍성한 음악회이다. 이인영 교수가 이번 렉처를 통해서 원로 음악인이 후배들에게 해방 전후 과거의 발자취를 전해줌으로써 우리나라 음악, 특히 성악에 있어 앞으로의 방향을 잡는데 하나의 지팡이가 될 것을 기대한다. 우면산이 보이는 이인영 교수의 자택에서 그의 음악인생과 후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들어보았다.

미수(米壽): 여든여덟 살을 달리 이르는 말.



1. 나에게 음악이란?

처음에는 음악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생각을 보통 쉽게 하지 않죠. 누구든지 공부를 하다가 그것이 직업이 되고, 교수가 되고, 무대에 서게 되는 것이죠. 저 또한 그저 음악이 좋아서 어린 나이에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음악은 지금 나에게는 내가 살아온 삶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2. 현해탄을 건너서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한국은 극심한 혼란이 계속되어 교육의 공백이 컸습니다. 젊은 학생들은 일본으로 도항하고 싶어 했으나, 그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압박 속에서 허덕이던 학생들은 대부분 동원되어 중학생 나이 이상은 일을 해야 했고, 종전 후 2~3년의 세월이 지나도 가르칠 선생들은 일본으로 떠나서 배움의 장은 마련되기 힘들었고,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48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일들 사이에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국민들은 마음이 너무 어려워졌습니다. 선생님이 없으니 레코드를 통해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다보니 음악에 빠지게 되었고, 그 음악이 마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에서는 음악을 하려면 제대로 하던지 아니면 그만하던지 하라고 압박을 주셨죠. 사실 처음에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습니다. 당시에 피아노가 흔치 않은 악기였기에, 바이엘 교본을 사서 교회에서 오르간으로 연습했었죠. 두 번째는 작곡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작곡공부도 시골에서 하기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로 악기를 해보자고 했는데, 악기를 구하기도 힘들고 돈도 없어서... 그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노래를 시작했는데, 내가 평생의 업으로 삼아도 되는지 확신이 필요하여 어느 분을 찾아가서 노래를 봐달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오신 선생님께 찾아가서 전문가가 되어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그분이 “전문가가 되도 될 만한 목소리인데 이 길이 험난하니 잘 생각해서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집에 돌아와 그분의 말씀을 되새겨보니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와 집에서 서로 마찰이 생겼습니다. 정식유학이 있을 수 없었던 당시에는 종전 후의 혼란한 틈을 타서 몰래 일본으로 도항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쉽지 않았던 것이 신뢰 할 수 있는 안전한 선박에 승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았고 안전의 보장도 있을 수 없는 위험천만한 모험이었습니다. 또한 악질업자에게 사기를 당하던지, 악천후로 배가 난파하여 전원이 사망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죠. 그래서 그 누구도 두려움 때문에 일본 유학에 희망을 걸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는 남해안의 항구나 어촌을 찾아다니면서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집에서는 바보 같은 짓하지 말라고 야단을 맞았고, 또 엄청난 열성에 기막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19살의 나이로 몇 번이나 속을 뻔한 곤경에 빠지면서 통통배를 타고 겨울바다를 건너 일본을 갔습니다. 낙동강 주변에서 출발해 규슈 바다에 도착했습니다. 산으로 들어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도회로 나가, 도쿄를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3. 일본으로 건너가 시작한 음악생활

당시에 연습할 자리조차 없으니 교회에 목사님을 찾아가서 도움이 될 만한 분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의 소개로 만난 분은 공부와 지리에 대해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놀랄만한 일이 일어납니다. 한인교회에 제가 갔는데 전부터 알고 지냈던 소프라노 황영금(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을 만났습니다. 당시에 저는 음악을 해야할까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황 교수님이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동경예술대학 입학시험을 보고 나란히 합격하여 입학했습니다. 그때부터 친구가 되었죠.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다가 4학년이 되어, 후지와라 오페라단의 신인 오디션에 참가하고 붙게 되었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니 내 앞에 나와 같은 베이스가 있었는데, 그 성악가가 자리를 옮겨서 마침 베이스 자리가 공석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와서 노래를 부르니 후지와라 선생님이 흡족해 하시면서 4월 달에 오페라 「타이스」를 통해 데뷔하자고 하셨습니다. 일본은 3월에 졸업이고 4월에 신학기를 시작하는데, 졸업하자마자 바로 데뷔를 한 셈입니다. 12월부터 오페라 연습을 시작하면서, 아마 우리학교 졸업생 중에 데뷔가 가장 빨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공연을 마치고 다음날인가 석간에 음악평이 있었는데, “조선사람 김군(당시에 일본에서 사용했던 예명 김경식)의 목소리는 마력이 있고 전도가 유망하다.”/ “이 사람의 목소리는 빛나고 있다. 유망하다.” 라고 호평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6월에는 「돈 조반니」, 가을부터는 「토스카」, 「라 보엠」, 「리골레토」, 「아이다」 등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4. 한국으로 돌아와 후세들을 위해 살기로 마음먹다

일본에서 활발하게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조국을 향한 생각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다 1959년 1월에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일본에서 모국방문단이 있는데, 같이 가겠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1959년 1월 13일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당시 KBS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계셨던 임원식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로 만나기를 청하니 “당신을 일본 음악 잡지에서 봤습니다. 만납시다.”라고 대답하셔서 만남이 바로 성사 되었습니다. 당시에 임원식 선생님이 저를 만나고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그 자리에서 바로 한국일보의 장기영 사장님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장기영 사장님이 저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사진 기사를 불러서 기사로 크게 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물으시기에, 독창회를 할 수 있겠냐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1959년 9월 23일에 한국일보의 배려로 서울의 유일한 음악회장인 명동시공관에서 화려한 독창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에 인사를 하러 갔는데, 당시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은 건물도 없는 비닐하우스였습니다. 나는 내심 마음으로는 놀랬는데, 그곳에서는 “내년에 음악대학이 생기니 걱정하지 마세요. 가을에 오페라 「라 보엠」을 하는데 우리랑 같이 하겠습니까?” 라고 물어서 “그 오페라에 나오는 역이 내 18번입니다.”라고 대답하며 연출과 출연을 승낙했습니다. 당시에 한 「라 보엠」이 우리나라 초연이었습니다. 그 오페라를 마치고 일본으로 잠시 돌아와 오페라를 공연했는데, 한국에서 오는 성화와 같은 독촉 편지에 좀처럼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괴로웠습니다. 현제명 선생님이 “일본에 계속 머물 것인가? 한국에 있을 것인가? 그러면 내가 초청하면 오겠소? 학생들이 3월 달부터 기다리고 있소.” 라고 말씀하시기에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 드렸습니다.


당시에 일본에서는 귀국은 아직 이르다고 했었지만, 나는 나대로 한계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연령적으로도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꿈 대신 새로운 세대를 가르쳐, 다음 세대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생각이 섰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려고 마음먹은 것이죠. 오늘날까지 몇 십년간 이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1960년 4월부터는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독창회, 음악회, 오페라 연습, 공연 그리고 결혼을 했습니다. 독창회도 서울, 부산, 대구, 광주를 3일에 한 번씩 해서 열흘 만에 전국 순회 연주를 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왔지만 경제적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방을 얻어서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해도 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글셋방을 얻어서 출발을 하였고, 사글셋방에서 전세방을 전전하다가 사당동에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이정민: 어머니가 의사 선생님이셨는데, 당시에 의사가 성악가와 결혼하는 것이 파격적이었습니다(웃음). 어머니 쪽에서 반대를 하셨는데, 어머니 집안에 이모님도 의사이시고 외삼촌은 서울대 공대 나오셔서 공무원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갑자기 음악 하는 분이랑 결혼한다하니까 온 집안이 반대를 한 것이죠. 외할아버지께서 책을 많이 읽으셨는데, 우리나라 인명사전에서 이인영 이름을 찾으셨습니다. 이를 보고 외할아버지께서 인명사전에 나온 것을 보니 결혼을 허락해도 되는 사람이겠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두 분이 유명하게 결혼하시고, 어머니께서 국립의료원에 30년 동안 흉곽내과 과장으로 계시면서 지금까지 지내셨습니다. 요즘은 의사와 예술인이 결혼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드물었어요. 아마 예술가가 의사와 결혼한 1호가 아닐까 싶어요(웃음).



5. 미수기념 음악회의 소감을 말씀해주세요.

누구든지 자신의 나이를 다 기억하잖아요. 나이가 90이 가까이 되고 미수가 되니, 살고 있는 자체가 기적 같습니다. 미수가 된 기념으로 제자들도 많으니 이런 모임을 한번 가져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제안을 듣고, 한번 해보고자 용기를 냈습니다. 그냥 음악회를 하는 것보다는 렉쳐(lecture)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와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생각을 해서 꾸며 보았습니다.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은 분들 중에서 일본에서 결혼해서 그곳에서 삶의 터전을 꾸린 사람, 북한으로 넘어간 사람, 한국과 연을 끊은 사람 등 한국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 분들도 있습니다. 이번 렉처에서는 우리 음악계에 전문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언제부터 활동했고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그중에서 어떠한 큰 음악적인 역량을 가지고 후세대를 위해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일본과 우리와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눈물 나는 사건들도 많았고요. 일화도 말씀드리면서 초창기 성악가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고 싶습니다. 그동안은 나만 알거나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었던 사실과 일화를 누군가는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정민: 아버지 세대가 우리나라 음악가 1대 원로입니다. 우리나라 서양음악이 100여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굉장히 많이 발전 하였습니다. 처음 우리나라에 아무것도 없는, 풀뿌리 같은 음악의 시작이 있었는데 그 기간이 상당히 짧잖아요. 그분들이 한분씩 돌아가고 계시는데, 그분들이 가지신 과거의 유산을 후대에게 넘겨주시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클래식이 사양산업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방향을 잡아갈지 막막해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물론 지금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기는 하지만 사실 아버지 세대의 분들에 비해서는 지금 굉장히 많은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그때의 유산을 오늘날 넘겨주심으로써 젊은 사람들이 앞으로의 방향을 잡는데 나침반이 되지 않을까 해서 렉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6. 이번 음악회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우리나라에서 제자가 많기로는 피아노 중에서는 정진우 선생님이고, 성악에서는 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 정진우 선생님 제자들을 표현하기에 정진우 사단이라고 하는데, 저의 제자들은 아마 군단쯤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웃음). 음악회를 하려니까 모든 제자들이 다 무대에 서려면 적어도 일주일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훌륭한 제자들이 많아서 모두 무대에 올려 연주를 듣고 싶지만, 너무 인원이 많다보니 다 세울 수 없어서 다른 방향으로 취지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음악회는 제가 간단하게 렉처를 하고 이태리에서 활동하는 Lilla Lee와 이 마에스트리가 연주합니다. 현재 이태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나라 소프라노 중에서는 드라마틱 소프라노를 하는 사람은 이 사람 밖에 없습니다. 오페라 「토스카」, 「아이다」, 「투란도트」 같은 극적인 오페라에 주역을 하고 있습니다. Lilla Lee는 제가 고등학교 때 3년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태리로 유학을 가서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프라노를 세워서 노래를 부르고, 마지막에 축하 기념으로 이 마에스트리 합창단이 나와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이마에스트리는 한국의 남성전문성악가들이 함께 연주하는 단체로,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음악감독 양재무는 저의 제자이고, 단원들도 제게 배운 분들이 여럿 계십니다. 반주를 맡아준 서울대학교 주희성교수도 학생 때부터 눈에 띄던 훌륭한 반주자이고 피아니스트였는데, 이번에 함께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퇴직 후에 4권의 책을 냈습니다. 앞에 낸 2권은 일본말로 냈는데, 일본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진실과 우리가 주장하는 것, 일본과의 관계를 위해서 말하려고 일본어로 썼습니다. 이것은 일본인들에게 꽤 인기 있었습니다. 내용 중 하나를 예로 들면 <일본의 여러분> 이라는 소제목 아래, 독도 이야기와 대한제국을 일본에게 잃어버린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의 당신들의 야망은 뭐냐고 신랄하게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번 렉처의 내용을 소책자로 내서 음악회 오시는 분들께 선사할 예정입니다.



7. 원로 음악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현재의 한국 성악계

성악이라고 하는 장르에 대해서 나는 젊을 때부터 TV나 학교, 교회에서 열심히 하면 음악가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해왔는데, 어떤 책을 보니까 성악이 사양예술(斜陽藝術)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거기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싶은 것은 모든 분야가 다 사양입니다. 정치를 하고 싶다고 그 분야에 뛰어 들어도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1000명중 1명입니다. 전체적으로 경쟁이 심한 사회가 되었으니 음악 또한 같겠죠. 내가 어릴 때는 대한민국이 1500만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5000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경쟁이 심해졌으니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열심히 진로를 생각해야 합니다. 진로에 대한 생각을 덮어놓으면 안 됩니다. 저 자신도 운이 좋게 성악을 하게 되었는데, 성악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저 목소리 하나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출처 음악춘추 2017년 6월호

글_김진실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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