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썸남 박경준의 오페라 산책 : 안드레아 쉐니에


go BBStar Magazine Menugo Stage Magazine Menugo Stage Vol.05






해와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지존하신 환상 앞에 나는 힘을 잃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열정과 의미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바퀴와 같이
“해와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이” 들리고 있다.
사랑이 해와 별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처럼. 단테, 신곡 (천국편) 33곡

Comme un dernier rayon, Andre Chenier
Comme un dernier rayon, comme un dernier zephyre
Anime la fin d'un beau jour,
Au pied de l'echafaud j'essaye encor ma lyre.
Peut-etre est-ce bientot mon tour ;
Peut-etre avant que l'heure en cercle promenee
Ait pose sur l'email brillant,
Dans les soixante pas ou sa route est bornee,
Son pied sonore et vigilant,
Le sommeil du tombeau pressera ma paupiere !
Avant que de ses deux moities
Ce vers que je commence ait atteint la derniere,
Peut-etre en ces murs effrayes
Le messager de mort, noir recruteur des ombres,
Escorte d'infames soldats,
Remplira de mon nom ces longs corridors sombres.


마지막 광선처럼, 마지막 미풍처럼
어느 아름다운 날의 종말이 단두대 아래에 생명을 불어넣어
나는 아직도 나의 서정시를 쓰려 하고 있다
아마도 내 차례가 빨리 오겠지?
하늘로 데려가는 시간이
번쩍번쩍 빛나는 에나멜위에 놓이기 전에
종말을 고하는 60발자국을 걸을 때
주의 깊고 당당한 발걸음
무덤속의 수면이 내 눈까풀을 무겁게 누르겠지! 내가 시작한 이 시구에
그 목적의 마지막에 도달하기 전에
아마도 이 놀란 벽돌사이에
죽음의 메시지, 어두운 그림자가
불명예스러운 군인들의 호송을 받아오고,
어두운 이 복도에 내 이름으로 가득 채우겠지.......

Andrea Chenie 안드레아 쉐니에
역사에 대응하는 예술가 저항시인
이 이야기는 작품속의 치명적인 종소리들 가운데 하나인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리면서
시작된다. 프랑스 군주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변화시킬 폭풍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다.
불평등의 세계, 귀족과 평민들의 세계는 영원히 없어지게 되고, 평등의 세계로 교체된다.

안드레아 쉐니에 2막을 위한 파올로 브레니의 쇼묘작품 스칼라극장

“Andrea Chenie”안드레아 쉐니에 시민혁명 공포정치의 희생자

[안드레아 쉐니에]는 1880년대에 당시의 문학.예술계를 풍미한 <베리즈모*>(현실주의)의 흐름에서 태어난 지오르다노의 대표작이다. 프랑스 혁명을 무대로 한 인물과 줄거리의 설정은 틀림 없이 <살아 있는 인간 생활의 충실한 모사>이며, 회상적인 모티브의 사용이나 색채감 있는 화성과 관현악법에 뒷받침된 긴박감이 있고 리얼한 감정 표현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 흐름에 속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베리즈모의 성악 양식을 <극적 효과의 고조에 의해서 벨 칸토의 서정성에서 떨어져 나가 있는 것>(리이만 음악사전) 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 오페라에는 꼭 들어맞는 것이 아니다. 곧 갖가지 아름다운 선율로 장식된 전동적인 벨 칸토에 의해서만이 상연이 가능한 건 아리아가 때때로 극의 긴박한 흐름을 늦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아리아가 오늘날 이 오페라를 유명하게 만들고 있다.



※베리즈모 오페라란 신화에 바탕을 둔 비현실적인 영웅이 등장하던 기존의 오페라에서 벗어나 실제로 있던 사건, 인물들처럼 사실적인 내용을 다루는 오페라로 프랑스의 자연주의 문학운동이 이탈리아 색채를 띤 오페라로 변이 된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베리즈모 오페라 속 인물들은 장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개인의 고뇌를 낱낱이 드러낸다



※원작은 쥘 바르비에(Jules Barbier)의 '앙드레 셰니에(Andre Chenier)', 폴 디모프(Paul Dimoff)의 '앙드레 셰니에의 생과 작품들(Life and Works of Andre Chenier)'이며 이를 움베르토 조르다노(Umberto Giordano)가 오페라로 재탄생시켰다.



안드레아 쉐니에.
오페라의 주인공, 안드레아 쉐니에는 18세기말의 프랑스 혁명 시대에 살았던 실재의 시인(1762~1794)이다. 그는 1762년 10월 30일, 프랑스 외교관 그리스인 어머니 사이에 콘스탄티노폴(현재,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는데 3살에 아버지 조국인 프랑스로 이주해 파리 학교 콜레쥬 드 나바르에서 공부했다. 아주 젊어서 시의 번역가로서 상강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783년 스트라스블에 입학해서 사관 후보생이 된다.
3막 제라르의 아리아 Nemico della Patria(조국의 적인가)에서 그 경력이 나오는데 생시르 사관학교에서는 배운 적은 없다. 그러나 보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그의 위대한 정열인 시에 전념하고자 불과 수개월의 짧은 군인생활을 마지고 어머니가 운영하는 살롱에서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교류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시 쓰기를 시작한다(오페라에서는 대조적으로 그는 아주 용감한 군인이 된다). 그의 집안은 귀족계급과 폭 넓은 관계를 가지고 있어 1막에서 처럼 실제로 존재한 쿠와니 백작집안과도 사교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집안의 딸인 에이미(Aimee de Coigny)를 위해서, 쉐니에는 훗 날 유명한 시 사랑에 빠진 소녀(La jeune captive)를 쓰게 된다. 하지만, 실재의 에이미드 쿠와니는 오페라 속의 막달레나처럼 쉐니에와 불타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고, 그와 같이 죽었다는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1788 년부터 약 2년간 셰니에는 프랑스대사관에서 근무했는데 영국에 있었다.

그가 파리로 되돌아 온 무렵은 이미 프랑스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에 셰니에는혁명정부의 인권선언을 열광적으로 지지했지만, 점차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되면서 그의 과격한 집권에 반대해 당시 파리에서 발간되던 신문에 로베스 피에르와 논쟁하는 수많은 사설들을 실으면서, 로베스피에르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한다. 결국 혁명정부로부터 반혁명주의자로 낙인을 찍혀 신변의 위협을 느낀 셰니에는 두 번에 걸쳐서 노르망디 및 베르사이유로 몸을 피하지만 어느 날 파리 외곽의 파씨라는 곳에 사는 친구 집에 찾아갔다가 비밀경찰에 체포되어서 국가사범을 수용하는 생 라자르 감옥에 수감된다. 여기서 140 일에 걸친 감옥생활을 보내던 중에 그의 시 가운데서
가장 걸작이라고 평을 받는 <사랑에 빠진 소녀- La jeune captive>및 통렬한 <풍자시- Jambes>를 탈고한다. 결국 가족들의 필사적인 구명활동도 보람 없이 셰니에는 1794 년 7 월 25 일, 불과 31 세의 젊은 나이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버린다.
오페라의 내용처럼 죽음을 같이했던 여자는 없었다고 한다. 대신에 오페라에도 등장하는 실제존재했던 인물인 친구 루쉐가 셰니에과 같은 날 처형되었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한편, 공포정치로 폭정을 휘둘렀던 막시밀리안 로베스피에르도 셰니에가 처형되었던 불과 3 일 후 그도 단두대(길로틴)의 이슬로 사라졌다. 오페라에서 쉐니에의 치명적인 적으로 간주된 공적인 원고 안토니 포키에르틴빌레도 1795년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길로틴(Guillotin) 박사가 제안한 길로틴엣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루이 16세



※길로틴 박사에 의해 제안된 길로틴은 인간을 인간답게 죽을 수 있게 만든 획기적인 기계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물론 독일에서도 1949년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하는 데 사용되었다.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1일 혁명 광장에 설치된 길로틴으로 처형되었다. 루이 16세는 "나는 모든 죄목에 대해 무죄로 죽어간다"고 말했던, 마리 앙트와네트는 같은 해 10월 16일 역시 길로틴으로 처형되었다. 처형이 임박한 것을 알려주자 마리 앙트와네트의 머리는 단 며칠 사이에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의 반대자들을 신속하게 처단하기 위해 프랑스의 의사 조셉 길로틴(Guillotin) 박사가 사형 기계 길로틴을 발명했고 길로틴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라고 우리들은 알고 있는 단두대.

프랑스에서는 군중들 앞에서의 공개적인 단두대 처형이 1939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길로틴에 의해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처형된 것은 1977년이었듯, 근대까지도 우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길로틴(단두대), 즉 사람의 목을 잘라서 사형을 시키는 기계가 여러 면에서 인류가 만든 기계 중에서 가장 인간을 위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길로틴 박사는 1789년 국민공회의 대의원이 되어 10월 10일 국민공회에서 "사형은 신분의 구별 없이 모두 평등하고 더욱 인간적인 방식으로 집행되어야 하는데, 그 당시에 사형수에게 재빠른 죽음을 주는 것은 상류층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고, 일반 평민들은 심한 고문을 받으며 고통 속에서 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제안했을 뿐이다.

더구나 그가 단두대를 제안한 것은 프랑스 혁명 전이었기에 자신이 제안했던 단두대가 프랑스 혁명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하는 데 사용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민혁명

프랑스 혁명의 뿌리를 만든 사람은 루소로서, 루소의 사회계약설과 인민주권론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던 프랑스의 전제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최전성기의 왕루이 14세(1638-1715)는 왕권신수설로 신의 대리자로서 절대권력(짐이 곧 국가다)을 누렸다.
베르사유궁전을 건설하여 자기에게 불만이 있는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매일 수백명의 귀족들이 모여 연회를 하였고, 100년 동안 흔들림없는 전제 정치의 터전이 되었다.
그 후 즉위한 루이 16세는 우유부단한 성격에 왕이 될 자질이 없었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산업 혁명이 시작되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던 영국과는 달리,루이 14세 때 낭트 칙령의 폐지로 산업을 일으킬 만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프랑스를 떠났고, 경제발전이 정체된 상황에서 뒤를 이은 루이 15세와 루이 16세는 나라의 어려움을 타개하기는커녕 더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거기다 루이 16세의 신부 마리 앙투아네트는 합스브르크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서 오스트리아의 황녀로 전쟁과 인구폭등으로 평민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는데 정치는 몰라라하고 궁정생활에 익숙치 않은 철부지 14세 소녀는 우유뷰단하고 철없는 왕과 베르사유궁전에서 사치스런 생활로. 서민들의 세금은 점점 늘어만 갔다. 거기다 90년만의 한파로 밀가루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민심이 들끓던 이 시기에 파리를 중심으로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되었다. 이 혁명의 이념적 기초는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드니 디드로 등의 계몽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의 뿌리를 만든 사람은 루소로서, 루소의 사회계약설과 인민주권론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던 프랑스의 전제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루이 16세(재위 1774∼92)의 정부는 영국의 신대륙 진출을 견제하려고 미국 독립 전쟁(1775~83년)을 지원하였으나 과도한 군사비 집행으로 인해 재정궁핍에 빠지게 된다.
파산 직전에 이른 재정을 메우기 위해 제3신분인 서민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점점 과중해졌다.


서민들의 세금폭탄에 허덕이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온잦 금은보석과 패션, 화려한 머리치장이 1Cm가 높아질 때마다 백성들의 탄성은 커지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서민들의 소요를 무마하기 위해 서민들의 대변인인 쟈크 네케르를 재정장관으로 임명하고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는 베르사유 궁전의 살 데 메뉘 플레지르(Salle des Menus Plaisirs)에서 삼부회(성직자와 귀족은 전 인구의 3%, 평인은 97%)를 소집하였고,[6] 귀족 188명, 성직자 247명, 평민 500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특권 계층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안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귀족, 귀족, 성직자 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릿수 표결 방식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계급에 유리한 방향으로 회의를 이끄려고 한 것이다. . 평민 대표들은 머리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1789년 6월 20일 회의장을 테니스 코트 건물로 옮기고, 요구가 승인되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이 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국민의회를 조직하였다(테니스 코트의 서약). 국민의회에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던 로마 가톨릭 사제와 자유주의 귀족 47명도 합류하였다. 7월 9일에는 제헌국민의회라 칭하여, 인민의 최고 입법 기관으로서 프랑스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곧 프랑스혁명의 시작이다
민병대를 결성하여 무기 탈취하고 전제정치의 상징인 바스티유감옥을 점령하였다,
그 후 1791년 입법의회가 성립되었고 비운의 왕 루이16세는 1793년1월 기요틴(단두대)에 의해 처형되어 전제정치는 막이 내렸다,
프랑스왕의 처형으로 자신들의 권좌에 불안함을 느낀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나폴리, 로마교황 등이 프랑스와 대항하기 위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함께 동맹을 결성하였다
대내적으로는 혁명의 후유증과 외적으로는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혁명의 주역인 자코방파의 수장 로베스피에르도 단두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이러한 사회적 분이기로 나폴레옹이 탄생시켰고, 원권신수설로 인해 시작된 프랑스혁명이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으니 동 서양 역사는 흐르는 강물처럼 그 모습이 비슷하다....
17~18세기에 걸쳐 일어난 여러 시민 혁명들 중에서도 가장 의의가 깊은 것으로 꼽히며, 내부적으로는 연이어 즉위하는 무능력한 왕들과 사치와 권력 유지에 급급한 귀족들과 구체제의 모순을 뿌리 뽑았고, 외부적으로도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프랑스 혁명의 영향력이 주위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면서 19세기 이후 각국의 시민 혁명의 촉발제로 작용하였다.

테니스 코트의 서약



※프롤레타리아(독일어: Proletarier)는 사회적으로 하위 계급의 일원, 프롤레타리아트(독일어: Proletariat)는 하위 계급을 일컫는다. 피지배 계층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무산 계급(無産階級)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원 의미는 로마 제국 당시 군에 입대시킬 자신들의 아들(라틴어: proles, 자식) 이외에 부를 소유하지 못하는 무산계급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그 후 카를 마르크스가 사회학적인 용어로 도입하였다.

※부르주아지(프랑스어: bourgeoisie)는 원래 성 안 사람이란 뜻이었으나 마르크스주의 이후 현대에는 자본가 계급을 뜻한다. 프랑스어로 ‘성(城)’을 뜻하는 bourg에서 유래한다. 부를 축적한 계급은 안전하고 윤택한 성내에 살고 그렇지 못한 계급은 위험하고 척박한 성외에서 살았으므로 생긴 명칭이다. 이 유래를 좇아 부르주아는 자본가 계급을 뜻하게 되었고 반의어는 무산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아이다.
※계몽주의(啓蒙主義, 프랑스어: Lumieres 뤼미에르[*])란 18세기 하반기에 프랑스를 기점으로 유럽 전역에 유행했던 문화적, 철학적, 문학적, 지적 사조다. 이것이 흥했던 시대를 계몽시대라고 한다. 대표적인 철학자로 바뤼흐 스피노자, 존 로크, 피에르 벨, 아이작 뉴턴 등이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진보적 엘리트라고 생각했고, 종교적 정치적 박해에 맞서 투쟁했다. 계몽주의자들의 저작은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18세기 말의 정치적 대격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볼테르의 뉴턴 소개서- 뉴턴주의 지식을 어둠을 깨우치는 빛으로 비유했다.



※공포정치
지롱드파가 하층민의 식량 위기에 대해 아무런 정책을 취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면서 하층민의 분노가 폭발한다. 6월 2일, 하층민이 지지하는 자코뱅파가 국민 공회에서 지롱드파를 추방하고 로베스피에르가 권력을 장악했다.이런 상황에서 자코뱅 당은 독재 정치를 시작한다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통해 공포 정치를 했고, 반대파를 차례로 단두대로 보냈다. 자코뱅 파는 8월 23일에 “국가총동원”을 선포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정돈하고 외국의 간섭 전쟁에 반격에 성공했다.

-공포정치를 주도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안드레아 셰니에는 그리스인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헬레니즘의 사상과 사랑에 심취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기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모든 인류가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으로 공포정치를 끝을 보여준 혁명정부는 그에게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다. 31 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마친 그의 시는 아직 한편도 출판된 적이없지만, 사후, 프랑스 혁명기를 상징하는 예술가로, 가장 중요한 시인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오페라에서는 이렇게 실제로 존재한 안드레아 셰니에의 인간성 및 업적이 잘 그려져 있
는 한편, 여주인공인 막달레나 드 쿠와니와의 불타는 사랑과 또 다른 주인공인 카를로 제라르는 대본 작가인 일리카가 만든 드라마 구성에 필요한 허구의 인물이다. 하지만 일리카는 셰니에란 인물에 적합한 캐랙터를 만들어 오페라로서의 <안드레아 셰니에>의 완성도를 한층 더 높였다.

-안드레아 쉐니에 초연 포스터-

초연당일 바리톤의 장면이 시작된 직후부터 박수갈채는 터지기 시작했다.
제 1 막에서 셰니에가 부르는 즉흥시의 아리아 “임프로비조(Improviso)”는 셰니에의 시로 알려진
“ 정의에의 찬가- Hymne a la Justice” 에서 발췌한 곡인데 쉐니에역인 쥬세페 보르가티는 객석의 요청으로 다시 불러야했다.
하인인 제라르와 그의 아버지의 신분차별에 대한 분노도 역시 그의 실제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오페라가 점점 무르익어감에 따라 관중들의 반응은 점점 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화가 보나모레의 오페라를 구성하는 4개의 그림 중 첫 번째-

또, 지오르다노는 그의 가극대본작가인 일리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법정재판소(혁명재판소)장면을 3막에 결부시킨다는 당신의 생각은 퍽 훌륭하오 그런 식으로 한다면, 4 막에서는 그 자체의 상황이 흥미롭기 때문에 특별한 싱글러브-듀엣으로 진행시키고 셰니에가 부르는 아름다운 아리아 “ 오월의 어느 사랑스런 날처럼- Come un bel di di maggio” 도 셰니에의 실제 작품인 “ Comme undernier rayon- 마지막 아름다운 햇살처럼”이라는 시를 일리카의 극작가로서의 재능과 창작력이 최고조로 표현된 아름다운 곡이다. 그리고 지오르다노는 2막에 어떤 변화를 주고 싶었다. “Sansculotte(프랑스혁명 당시 과격공화당)의 노래나 “V’e chi si duol del cittadino Iddio등 대신에 나는 오케스트라를 위해 론다(Ronda: 스페인의 구 카스틸라 지방의 한 민요)를 넣었으면 하는데, 이러한 론다는 앞서 연주된 론다에다 분명히 중요성과 색다른 묘미를 가져다 줄 것이오, 거기에는 “Sansculotte의 노래와 램프-라이터(점등부)의 노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건 별로 눈에 띄지는 않을 것이오. 난 벌써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작곡했는데,아주 근사하기 때문에 꼭 그것을 오페라에 넣고 싶었는데 루이지 일리카는 그의 제안에 동의한다. 그래서 “공화주의자”들은 단순하게 혁명의 노래, 카르마뇰(Carmagnole)을 허밍하고, 점등부들은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안드레아 쉐니에는 점점 무르익어감에 따라 관중들의 반응은 점점 달아올라 오페라가 끝나갈 무렵에 지오르다노와 손초뇨는 기쁨에 넘치는 전보를 일리카에게 보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출판사에서는 일리카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1막,3막,4막은 굉장히 훌륭했고,2막 또한 대만족이었습니다. 출연자들과 작곡자들은 20번이나 콜을 받았습니다. 다음 두번째 공연때 꼭 참석해 주십시오”

-화가 보나모레의 오페라를 구성하는 4개의 그림 중 2 번째-


지오르다노는 일리카에게 보내는 전보에 “기가 막히고 ,진귀하고 감동적이었다”라고 자신 나름대로 묘사를 덧붙이고 우정어린 인사를 보냈다. 언론은 그 오페라에 대한 대중들의 우뢰와 같은 성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손초뇨의 음악적 조언자이자 일 세콜로지의 비평가로서의 두 역할을 맡고 있었던 아만토레 갈리는 오페라<셰니에>에 대해서는 어떻게 비평해야 좋을지 난감해 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쓸 수밖에 없었다.<셰니에>에 나오는 모든 음악은 무엇보다도 밝고, 이해하기 쉬운 양질의 음악이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무리 없이 진행되어 흐르며, 치솟는 호소력 짙은 음악이다.<셰니에>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총보는 시종일관 서정적인 것이었다”
저녁일간지에서 알프레도 콜로바니는 지오르다노가 아직 뚜렷한 음악적인 개성이 부족하다고 말하기도 했으나, “극이 요구하는 강렬한 색채와 다양한 색조를 부정 하지 않는 풍부한 색채의 파렛트를 가지고 있다”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마침내 지오르다노는 장의사의 지하방에 기거했떤 자기 방에서 떠날 수 있었으며, 그 해가 가기 전에 그는 밀라노의 그랜드호텔의 스위스 지주의 딸이자, 그의 약혼녀이기도 한 “올가 스파츠”와 결혼 할 수있었다. 한 겨울을 그 호텔에서 묵었던 쥬세페 베르디(1831~1901)는 스파츠(지오르다노의 부인)에게 부채를 선물했다.
지오르다노의 오페라로서는 이 외에 [페도라],[시베리아]등이 알려져 있는데 모두 오늘날에는 거의 상연되지 않고 있다.



작곡의 경과와 베리즈모의 태동

움베르토 지오르다노 이탈리아 작곡가

새로운 1막짜리 오페라를 위한 대회는 1888년 음악 출판업자 에도아르도 손초뇨에 의해 주최되었으며 70명이 넘게 참가하였다. 오페라 애호가들이 알다시피 그 대회의 우승자는 피에트로 마스카니로서, 그의 나이 20대 중반에 그는 남부 이탈리아의 한 도시의 시립음악단장으로 있었는데 그의 봉급으로 그의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1890년에 상연되었으며, 바로 그 오페라는 ‘마스카니’뿐만 아니라 전체의 모든 현실 묘사주의운동(Veresmo movement)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새로운 오페라 역사의 한 장을 열게 하다. 그렇다면, 그 대회에 참석했던 그 밖의 다른 참가자들은 어떠했을까?
그 대회에서 명예로운 찬사를 받았던 하나의 작품이 있었는데, 그 작품의 작곡자 또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바로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여 장학금으로 나폴리 음악학교에서 공부했던 21세의 가장 나이 어린 참가자였던 “움베르토 지오르다노”였던 것이다. 그가 학생때 쓴 오페라 <마리나>는 입상하지 못하였으며, 그 《마리나》(Marina) 오페라는 지금까지 한번도 상연되거나 출판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마리나>는 적어도 두 대회의 심사위원중의 하나였던 그 유명한 ‘루이 블라스’와 주옥 같은 오페라를 작곡한 ‘필리포 마르케티’에게 커다랑 감명을 주게 된다.

또한 다른 심사위원 ‘아만토레 갈리’는 <마리나>에 대해 “뽑힌 작품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 수작이었는데, 그 작품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하였으나 <마리나>는 극적인 생활, 인물들의 성격, 무대장치가 배제된 “리프레토(Libretto:가극가사,대본)때문에 탈락되었다. 그러나 작품은 강렬하고, 이채롭고, 독창적이었으며, 매우 훌륭한 재능이 엿보인 수작이었다”라고 그의 견해를 표명했다.
그의 재능은 이 출판사의 사장의 인정을 받아, 오페라 《추락한 인생》(Mala Vita)[말라 비타](1892년)를 작곡했다. 3번째 작픔인 [디아즈 왕비]《디아즈 왕녀》(Regina Diaz) (1894년)를 잇달아 발표하였으나 단 2회 상연이 중단되는 듯 연속해서 실패해 모두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한 때 푸치니와의 합작으로 유명한 당시 일류의 대본 작가 일리카와 알게 되어 밀라노의 스칼라좌를 위해 대작을 만들게 되었다. 그는 일리카의 집에 가깝게 밀라노로 이사하여 기거하였다.
지오르다노는 일리카가 보다 빨리 작품을 만들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서른아홉살의 일리카는 사르도우의 <토스카>에 대한 가극 대본을 출판업자인 리코르디와 그의 동료, 가극 대본작가인 지아코자와 끈질기게 푸치니와 함께 준비하고 있었다. 1894년 봄, 지오르다노는 스위스에 머물고 있었다. 그 해 3월에 그는 일리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난 오직 한 가지 일을 꿈꾸고 있는데, 여름에 당신과 나만 이곳에 올 수 있었으면 하오.. 그리고 겨울철을 대비한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매년 이곳에 올 수 있었으면 좋겠소” 지오르다노가 스위스에 머무는 동안, 그는 <셰니에> 의 1막과 2막을 작곡하였다. 1895년 지오르다노는 일년의 대부분을 밀라노에 머물렀으나 일리카는 상당한 기간동안 여행을 가져야 했다. 믿어지는가?

움베르코 죠르다노 자필서 사본과 자필 총보 사본

그들이 함께 만들었던 공동 작품은 대부분 서신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들의 모든 힘을 짜내어서 오페라의 창작에 쏟아 1896년 1월 27일에 전곡을 완성시켰다.
초연 1896년 3월28일. 밀라노, 스칼라좌 안드레아 쉐니에 역은 쥬젭베 보르가티, 맛달레나 역은 에브리나 카레르아, 제라르 역은 당시의 명가수 마리오 산마르코가 맡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제 1막의 유명한 즉흥시 “어느 날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는 대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글 발행인 박경준 (buon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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