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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타노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의 전성기의 선구자가 되었던 [사랑의 묘약]은 [안나볼레나 Anna Bolena]에 이은 성공작으로 오늘날 [루치아 Lucia di Lammermmoor]와 아울러 그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많이 상연되는 명작이다. 비극적인 전자는 대극장에서 잘 상연되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중,소극장에서도 자주 상연되고 있다. 도니젯티가 35세 때의 작품으로 희극적인 면에 있어서의 그의 재능이 잘 나타나 있고, 도니제티는 작곡 속도가 빠르기로 유명했다.[사랑의 묘약]도 2주안에 썼다고 한다.8일 만에 썼다고 전설적인 기록도 구전된다.
분명 도니젯티는 많은 시간이 없었다는 건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묘약은 밀라노에 있는 카노비아나극장에서 새로운 오페라 공연계획이 작곡가의 펑크로 인해 새로운 오페라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스겟 소리로 바람에 악보가 날아가더라도 그것을 줍기보다 다시 작곡하는 것이 빠르다고 알려진, 작곡속도가 빠른 도니제티가 의뢰받게 되었다.
베르가모 태생인 이탈리아의 작곡가. 롯시니, 벨리니 등과 함께 19세기 전반의 이탈리아 가극계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가업을 계승시켜려고 했으나, 음악 공부를 고집하여 결국에는 부친의 허락을 얻어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하게 되었다. 18세경에 그는 볼로냐 음악원에 입학하여, 맛티에게 대위법을 배워, 그 무렵부터 가곡, 종교곡, 가극을 썼는데, 초기의 가극 3편은 미상연이었다. 그의 초기 가극 작품은 롯시니의 영향을 받아 롯시니의 모방에서 시작되었는데, 1830년의 《사랑의 묘약》, 이듬해의 《루크레찌아 보르지아》, 이어 《랍메르무어의 루치아》 등 연달아 발표하여 국내에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높였다. 계속해서 《연대의 아가씨》, 《돈 파스콸레》 등으로 인기의 절정에 올라섰다. 속필이었던 도니제티는 생애에 67곡에 이르는 가극 외에, 다수의 성악곡, 기악곡을 작곡했는데, 그는 주로 가극 분야에 걸작을 남겼다. 그의 가극의 특징은 관현악법의 결함을 보충하고도 남을 극적인 박력과, 선율의 아름다움에 있다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롯시니와 벨리니, 그리고 도니셋티의 세 사람은 베르디에 앞서는 전 세기의 3대 거장인데, 소위 벨 칸토 오페라 작곡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손꼽힌다.
〔주요 작품〕 가극 《안나 볼레나》(1830), 《사랑의 묘약》(1832), 《루크레찌아 보르지아》(1835), 《연대의 아가씨》(1840), 《파보리타》(1840), 《돈 파스콸레》(1843) 등.
초연포스터 1832년5월12일 Cannobiana 극장 밀라노 이태리
제10회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 개막작 사랑의 묘약 포스터
롯시니가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13일만에 작곡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도니제티는 도전의식에 불탔을 것이다. "그래? 까짓 13일?“ 그 뚱뚱하고 느려터진 롯시니까 13일이나 걸렸지"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리고 도니제티는 롯시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베르디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계보를 잇는 작곡가인 것이다.
동시대 1801년생인 벨리니와 쌍벽을 이루는 이태리 낭만주의 오페라의 대표자이었는데 일찍 사망하여 명성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였다.
벨리니곡과 분위기가 비슷하지만 벨리니보다는 분위기가 밝고 가벼운 것이 특징이다.
낭만주의는 18세기 계몽사상가들, 특히 이성을 신뢰하던 철학자들을 혹독히 비판하며, 그들이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마비시켜켰다고 비판하고, 이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감정을 없애야 된다고 주장할 때 낭만주의들은 오히려 자기의 감정이 인도하는 대로 마음껏 행동하라고 권했다.
루소는 이렇게 주장했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느낀다는 것이고 감정은 이성보다 앞서서 존재한다."
시인이자 미술가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도 말했다.
"인간이 소유한 이성의 능력이란 불멸의 영혼에 껍질을 입힐 뿐이다."
블레이크는 이성에 의하여 파악할 수 없는 신비한 영혼을 중히 여겼다.
낭만주의적 풍조는 다양성의 가능성도 제고시켰다. 법칙에 따른 그림기법, 작곡기법, 시의 운율 등은 무시하고 과거의 규범에서 해방된 예술의 각 분야는 문화유산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음악의 경우 고전파들이 지켜온 대위법 등의 형식은 사라지고, 쇼팽(Chopin), 멘델스존(Mendelssohn), 리스트(Liszt) 등이 자기의 감정을 악곡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표현했다. 즉, 낭만주의 음악은 고전주의의 일정한 형식미에 대해 반발하여 생긴 음악이다. 고전주의가 자연의 멋을 노래한 것 이라면 낭만주의는 인간내면의 희로애락을 표현한 것이다.
이 오페라는 1832년 5월12일에 큰 성공을 거뒀다. 처음에는 32개의 연극이 있었다. La gazzetta di Bergamo에서는 “음악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재미까지 있다”라고 썼다. 관중과 평론가들이 접한 것은 서정적이면서 재미있는 혼합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음악적 아이디어와 색깔이 풍부하다는 면이 오페라의 음색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도니젯티는 아리아, 듀엣, 트리엣, 앙상블을 마법처럼 조화를 이루게 하였고 이로 인하여 이 오페라가 신선하면서 뒤쳐지지 않고 영원히 우리 곁을 지키는 것이다.
로마니는 90여개의 오페라대본을 집필하였고 그의 대본으로 오페라를 작곡한 작곡가들은 빈첸초 벨리니(Vincenzo Bellini), 가에타노 도니젯티(Gaetano Donizetti), 사베리오 메르카단테(Saverio Mercadante), 쟈코모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 죠반니 파치니(Giovanni Pacini), 죠아키노 롯시니(Gioachino Rossini)와 쥬셉페 베르디(Giuseppe Verdi)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의 대부분이었다.
그중에서도 작곡가 벨리니와의 관계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데 로마니의 대본을 매우 좋아한 벨리니는 그의 전체 10개의 오페라 가운데 7개의 오페라를 로마니의 대본으로 작곡했다. 로마니의 대표작으로는 롯시니가 작곡한 [이탈리아의 터키인(Il Turco in Italia)](1814), 도니젯티가 작곡한 [안나 볼레나(Anna Bolena)](1830),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1832), 벨리니가 작곡한 [해적(Il pirata)](1827), [카풀레티와 몬테키(I Capuleti e i Montecchi)](1830), [몽유병 여인(La sonnambula)](1831), [노르마(Norma)](1831), 베르디가 작곡한 [하루만의 임금님(Un giorno di regno)](1840) 등이 있다.
그리고 [사랑의 묘약]은 음악 뿐 아니라 드라마에 있어서도 위대한 전통을 가진 작품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전원, 농부들의 세계, 밀밭, 와인 플라스크, 농기구, 이탈리아 시골의 시냇가 등, 본래 저자가 기술한 그대로의 작품 배경을 사용합니다. 사실 이 자품의 소재는 전혀 이탈리아적이지 않습니다. 대본작가 펠리체 로마니 (Felice Romani)는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를 흐르는 아두르강가의 전원마을 바스크지역 주민들 이야기로 기술했는데, 이 지역은 1832의 대중에게는 완전히 이국적인 곳이었습니다. 사실 [사랑의 묘약]은 그 시대 가장 저명한 프랑스 극작가인 외젠 스크리브(Eugene Scribe)가 파리의 극장들과 오페라 (Auber)의 음악을 위해 쓴 대본 “Le philtre”를 번역한 것입니다.
외젠 스크리브(본명:Augustin Eugene Scribe)는
1800년대 전반 프랑스의 대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극작가, 대본작가이다. 스크리브는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비단을 판매하는 상인이었다. 그는 파리의 생 바르브 학교(College Sainte-Barbe)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일찍이 희곡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여 18세부터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1815년, 스크리브는 친구 델르스트르 프와르송(Delestre-Poirson)과 함께 희곡 [경비병의 밤(Une nuit de la garde nationale)]을 발표하였고 이 작품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극작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곡가 다니엘 오베르(Daniel-Francois-Esprit Auber)를 위해 쓴 오페라대본 [묘약(Le philtre)](1831) 역시 로마니에 의해 이탈리아어로 옮겨졌고 가에타노 도니젯티(Gaetano Donizetti)가 작곡한 오페라 [사랑의 묘약 (L'elisir d'amore)]은 1832년에 초연되었다.
평생 동안 연극대본, 보드빌, 오페라대본 등 다양한 희곡문학의 장르에서 500여 작품을 남겼다.
스크리브의 대표적인 오페라 대본으로는 죠아키노 롯시니(Gioachino Rossini)의 [오리 백작(Le Comte Ory)](1828), 쟈크 프로멘탈 알레비(Jacques Fromental Halevy)의 [유태 여인(La Juive)](1835), 쟈코모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의 [위그노 교도들(Les Huguenots)](1836), 가에타노 도니젯티(Gaetano Donizetti)의 [라 파보리타(La Favorite)](1840)와 [동 세바스티앙(Dom Sebastien)](1843), 쥬셉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시칠리아의 저녁기도(Les Vepres siciliennes)](1855) 등이 있다.
이것은 “사랑의 묘약”이 이탈리아의 “희극(Drama giocoso)”의 표현 방식과는 전혀 다른 형식을 가진, 매우 새로운 드라마였음을 설명해 줍니다. 이야기의 구조가 복잡하고 감정의 묘사가 매우 두드러지며, 종종 애수에 잠기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전통적인 이탈리아의 희극, 로시니 스타일의 코미디와는 거리가 멉니다. 또한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과 대조를 이룹니다. 새로운 형식의 오페라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탈리아 전통이 아닌 전형적인 파리 코믹스타일을 보이는 혁명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대한민국 최초 3D오페라 사랑의 묘약 포스터(서울 콘서트 메니지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