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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겨우 17세인 1855년에는 [C장조 교향곡]이라는 주목할 만한 연주곡을 만들었으며 이듬해인 1856년에는 칸타타 [다비드(David)]를 작곡해서 로마대상 작곡 콩쿠르에 제출하여
입상하였지만 너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대상을 놓치게 된다. 결국 1년 후 1857년에는 칸타타 클로비스와 클로틸드(Clovis et Clotilde)로 로마대상을 획득했으며, 이 후 관비로 3년여 이탈리아로 음악 유학 후 파리로 돌아와서는 그때부터 오페라 창작에만 주력하였다.
1863년 그의 나이 25세에 이국적인 선율의 3막 오페라 [진주조개잡이(Les pecheurs de perles)]를 작곡하였는데, 이 작품은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주목받고 인정받게 되는 비제의 최초의 중요한 작품이다.
1869년 2월에는 교향곡 로마(Symphony in C "Roma")로 개작한 로마 체재 중의 회상을
담은 모음곡 '로마의 추억' (Souvenirs de Rome)은 파들루의 연주회에서 연주된다.
그해 6월에는 스승인 프로망탈 알레비(Fromental Halevy)의
딸 쥬느비에브 알레비(Genevieve Halevy, 1849-1926)와 결혼했다.
1872년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의 소설을 극화한 [아를의 여인'(L'Arlesienne)] 이 작품으로 큰 흥행은 못하였으나 좋은 평판을 얻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비제는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는데 1871년에 완성한 알프레드 드 뮈세(Alfred de Musset)의 소설 '나무나(Namouna)'를 토대로 루이 갈레(Louis Gallet)가 대본을 쓴 단막의 로맨틱 오페라 [자밀레(Djamileh)] 이다. 이 작품은 비제의 동양에 대한 동경심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무대는 이집트로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비제 특유의 감미로운 멜로디가 흘러넘치며, 신비스럽고 이국적인 음악을 많이 사용했다.
그 시대에는 크게 주목 받지 못해 실패를 맛보았으나 100여년이 지난 현대에서 [자밀레(Djamileh)]는 음악적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 큰 특징 중 하나는 레치타티보(극중 대사)에도 반주를 사용했다. 이것은 당시의 음악적 관습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다.
등장인물은 자밀레(하렘의 여인), 하룬(왕), 스플렌디아노(하룬 왕의 시종장), 알메(여자 노예) 등이다. 1872년 5월 22일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자밀레(Djamileh)]로 실패를 맛본 후 실의에 차 있던 비제가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요청으로 프랑스 소설가인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erimee)가 1845년 발표했던 스페인을 여행하고 쓴 이 지방색이 풍부하고 정열적인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오페라를 작곡한 것이 바로 불후의 명작이 되는 [Carmen]이다.
소설 [카르멘]을 기초로 뤼도비크 알레비(Ludovic Halevy 1834〜1908) 와 앙리 메이야크(Henri Meilhac 1831〜1897)의 대본에 의해 탄생하였다.
원래 비제가 작곡한 「카르멘」의 형식은 말로 하는 대사가 있는 19세기 후반의 프랑스의 대표적인 장르의 ‘오페라 코미크’ 스타일이다. 그러나 사랑과 죽음, 삶의 의지와 인간의 운명이 묘사되는 비극적인 성격이 오페라 코미크와 반대되는 리얼리즘적 경향을 보인다.
1875년 5월에 비인 궁정 가극장의 지배인이 된 프란츠 야우나로부터 비인에서 상연하기 위해 말로 하는 대사를 레치타티보로 작곡하도록 조언을 받았지만, 그가 작고하고 말았기 때문에 비제의 친구인 작곡가 길로(Ernest Guilaud 1837〜1892)가 대신하여서 형식적으로 그랜드오페라 화 되었다.
최근에도 프랑스 이외에서는 대사를 생략하고 상연하는 일이 가끔 있지만 일반적으로 대사 부분은 레치타티보로 처리하고 발레를 덧붙여 그랜드 오페라로 공연한다.
발레는 제4막의 처음 합창 대목에 첨가되었고, 그 발레 음악으로서는 일반적으로 비제가 작곡한 「아를르의 여인」의 파랑돌이나 파스토랄, 또는 「파스(펠트)의 딸」의 집시의 춤이 적당히 사용되고 있다.
「카르멘」의 노래나 음악은 극의 내용에 적절하고 효과적이서 극음악의 천재 비제의 면모가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 노래에 오페라 코미크의 특색인 샹송이나 쿠플레를 채용하고, 언어의 맛과 리듬을 교묘하게 살린 반면, 오페라 코미크의 비속성을 피하고, 극적 표현에 독일과 이탈리아 오페라의 장점을 적당히 원용, 그것을 자연스럽게 통일시키고 있다는 것은 경탄할 만하다. 또 이작품은 남부 유럽의 지방색이 풍부한 작품을 진정한 스페인 음악은 근소하기는 하지만 교묘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재료를 잘 소화해서 이국조의 특성과 잘 조화시켜 훌륭한 효과를 내고 있다.
비제는 이러한 이색적인 소재를 그의 천재적인 독창력으로 대담하게 처리하여 전통적인 예술의 긍극적 목표라고 여겼던 '미(美)'대신에 진실이 주장되고 '추악함의 미학'이 음악에 포함되어 즉, 지나치게 낭만적이거나 미화시키기보다 현실적으로 진실 되게 표현하여 평범하거나 그 이하의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고 일상에서의 거칠고 투박함을 자연스럽게 연출하고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질투나 분노 같은 감정을 여과 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관습적인 번호 오페라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무대 위에서 극적 진실을 살리는데 성공하였다.
그 서민들의 소재와 미화된 가사를 사용하는 대신 일상적인 대화체를 사용하고 사랑표현 방식에서 내면갈등보다는 단순하면서 본능적인 감정의 직설적인 표현 등 이 작품에서 사실적인 환경 묘사와 인물 묘사의 참신성은 세월을 초월하여 빛을 내고 있어, 그 박진감 있는 리얼리즘은 이탈리아의 베리즈모 오페라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비제는 겨우 37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카르멘]은 그 때까지의 그의 작품의 집대성일 뿐 아니라, 구노 등 선배의 시도를 더욱 발전시켜 오페라계의 혁명적 신풍을 가져오게 한 걸작이다. 전통의 발판 위에 서서 관습적인 비속성을 배제하고, 참다운 프랑스 국민 오페라를 확립시킨 기념비적 작품으로 그 진가는 높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한 뜻에서 비제는 이 작품으로 독일의 바그너, 이탈리아의 베르디와 비교되기도 한다. 여하튼 [카르멘]은 로랑 롤랑이 말했듯이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와 함께 프랑스 오페라의 양극을 이루는 명작으로 세계중의 가극장에서 언제나 상연되는 인기 있는 명작이다.
또한 이 오페라의 부수 음악들을 골라 1882년과 1887년에 각각 6곡의 모음곡 형식에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것이 카르멘 모음곡 1번(Carmen Suite No.1)과 2번(No.2)이다.
이들 모음곡에 수록된 오페라 음악들은 동시대 비르투오소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스페인에 파블로 데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1908)가 자신의 바이올린 음악인 카르멘 환상곡(Carmen Fantasy, Op. 25)을 작곡했다.
원곡이 되는 [Carmen] 4막의 간주곡인 '아라고네즈' (Aragonaise)와 1막에 주인공 카르멘이 부르는 하바나 풍의 유명한 아리아 하바네라(Habanera)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춤곡인 세기딜라 (Seguidilla)이며, 2막 도입부에 나오는 투우사 에스카미요(Escamillo)가 부르는 투우사의 노래(Chanson du Toreador)와 3막의 간주곡(Intermezzo)과 녹턴(Nocturne)등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부수 음악들은 오늘날 오페라 이외에도 2개의 관현악 모음곡 레퍼토리로 많은 연주가 이루어진다.
이 오페라의 무대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19세기 초반인 1820년경 스페인의 남부 도시인 세비야이다. 이 도시는 오페라에서 공간적인 배경으로 곧잘 등장하는 곳인데 특히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나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에도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오페라에 관객에게는 매우 친숙한 도시이다. 작곡가나 대본가들의 시대 비판적인 작품을 다룰 때 등장하는 도시도 세비야이다.
[카르멘]은 전 4막으로 된 오페라로 극장의 공동 지배인중 한명이었던 아돌프 드 루벵
(Adolphe de Leuven) 의 반대부터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 공연이 확정되었으나, 초연을 위한 리허설 준비과정부터 상당한 난항에 부딪쳤다.
먼저 여주인공을 섭외하는 것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카르멘의 캐릭터가 당시 시대적인 정서로 보아 부도덕하고 너무도 파격적이어서 논란의 중심에 놓이게 될 부담으로, 비제가 처음에 낙점한 여주인공인 마리 로즈 (Marie Roze)는 카르멘의 경박함과 음란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제일 먼저 오페라 [카르멘]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표출하며 맡은 역할을 고사한 덕분에 갈리 마리에(Celestine Galli-Marie) 라는 [카르멘] 최적의 가수를 만날 수 있었으니 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르멘 역을 맡을 가수를 정하지 못한 채 수개월동안 속을 끓여야했다.
카르멘 역 뿐만 아니라 다른 출연진들도 연출자의 말을 도무지 듣지 않았다.
여성합창단원들은 ‘나보고 경망스럽게 싸우라고? 전 싸우는 사람 아닙니다!’라면서 담배공장 앞에서의 삶에 찌든 여공들의 집단 싸움장면을 거부하며 불평을 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도 곡이 너무 어려워 연주할 수 없다고 자주 불평을 했다.
그때마다 비제는 곡을 수정해가면서도 비제는 그들의 불평불만은 계속 들어야만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음악이 왜 스페인 스타일이냐? 여기가 파리이지 스페인이냐?’라면서 음악 자체를 비판했으며.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비평가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혹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평론에서 부도덕, 저질, 비교육적 등등의 단어들만 나열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공동 지배인중 한명인 아돌프 드 루벵 (Adolphe de Leuven)의 무식함으로 이해력 결여가 가장 큰 문제였다.
오페라 리허설 내내 마지막 장면을 고치라고 요구해왔다.
건전하고 파리시민들의 문화와 오락의 전당인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살인 장면은 불가였던 것이다.
또한 당시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은 재정난에 휩싸여 오페라 시즌 외에 가족들을 위한 연회장으로 대여하기도 했었다.
관람석을 포함해서 맞선보는 장소로도 하룻밤에 5,6건의 예약 신청이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렇기 때문에 살인 장면이 나오는 부도덕한 오페라를 공연해서 소중한 고객을 잃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드 르뱅과 몇몇 극장 경연진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또 다른 지배인인 듀 로쿠르가 비제의 편을 들어 드 르뱅이 사임하면서 해결되었다.
전 유럽에서 나폴레옹 1세의 정복덕분에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던 프랑스는 1870년과 1871년에 걸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너무도 쉽게 패하여 그 지위를 독일에게 넘겨주고 나폴레옹 3세는 황제에서도 폐위되기에 이른다.
폐위 이후의 파리 상황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프랑스 정부의 무능함에 나폴레옹 3세와 제2제정을 폐위한 다음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그러나 프로이센가의 굴욕적인 협상을 강행하더니 임시정부에 반발한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서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 프랑스 민중들이 세운 세계 최초의 노동자 계급의 자치에 의해 수립된 민주주의 정부이다.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지도체제, ‘파리코뮌’이 탄생하게 된다.
코뮌은 그러나 5월 28일 프랑스 정부군과 파리코뮌의 확산을 두려워한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벨기에, 영국의 연합군대에 의해 와해되었다. 이 과정에서 파리의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으며 전투는 1주일간 계속되었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에서 비제의 [카르멘]은 작곡되었다.
당시 스페인은 프랑스 출신의 부르봉 왕가가 지배했는데 스페인 혁명에 의해 부르봉 왕가가 축출되며 왕위가 공석 중이었다. 이렇게 공석 중인 왕위에 프랑스 출신이 아닌 프로이센 왕실과 인척 관계에 있는 레오폴트 대공을 앉히려 하자 당시 강대국이었던 프랑스가 강력히 반발한 것이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유럽에서의 영향력 약화를 염려했던 것이다.
결국 프랑스에서는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엠스 온천에서 휴양 중이던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에게 칙사를 보내 레오폴트 대공의 왕위 포기 각서를 받으려 했다.
빌헬름 1세는 프랑스 칙사의 내용을 재상이던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보냈는데 통일 독일에 대한 정치적 야심을 키우던 비스마르크는 이 전보의 내용을 조작해 프랑스와 독일 양 국민을 격앙케 하여 1870년 7월 19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하였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엠스 전보 사건’이다.
당시독일은 연방제국가로 여러나라로 나뉘어 있었는데 프로이센은 북부 독일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철혈재상으로 불렸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부 독일 연방제국에 남부 독일 제국의 지지를 얻어 병력을 더욱 증강하여 프로이센 독일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9월 2일 나폴레옹 3세는 독일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계속 다시 진격하여 파리를 포위하고, 파리에서는 공화제 국방정부가 조직되어 프랑스 국민은 더욱 완강하게 독일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9월 말에 스트라스부르, 10월 말에는 메츠 요새가 함락되어 파리도 1871년 1월 28일 마침내 성문을 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