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혜 : 소프라노


go BBStar Magazine Menugo Stage Magazine Menugo Stage Vol.13






스테이지 : 안녕하십니까? 투란도트 100회공연을 기념으로 저희 스테이지에서 만나 뵙게 되어 반갑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정원교수님 저희 스테이지 독자분들에게 인사 부탁 드립니다.

이정원 : 안녕하세요 스테이지 구독자 여러분, 언제나 애정하는 나의 동료이자 친구인 박경준 대표의 스테이지에서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테너 이정원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19로 문화예술계가 많은 어려운 가운데에 있는 중에도 이렇게 꾸준히 음악인들의 대화의 장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다시 큰 힘을 얻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스테이지 : 김인혜교수님! 이렇게 박경준의 스테이지의 1주년을 기념하여 커버스토리에서 만나 뵙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교수님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팬들에게도 반가울 것 같습니다. 저희 스테이지 독자분들에게 인사 말씀과 최근 근황을 부탁드립니다.

김인혜 : 안녕하세요? 스테이지 1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2014년 중국으로 진출하여 중국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4년부터 북경과 텐진을 중심으로 일을 시작하여 북경중앙 민족대학으로부터 외국인 전문교수(짠좌쪼슈)로 초청받고 일하다가 2020년 올해 3월부터 중앙음악대학(CCOM)의 정교수로 임용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온지 벌써 7년차로 접어들었네요. ‘시간은 지나간다‘ 는 말을 예전에 남편이 제게 해주었는데 진짜 그 말이 맞는구나 생각합니다.  

-NCPA음악감독, 중앙음악학원CCOM총장 위평박사와 함께-

지난 6년동안 중국내 최고의 음악인, 음악단체, 음악대학,  음악원들과 함께 일해오고 있습니다. 먼저 카랴얀의 마지막 제자로 중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로 샹하이필하모닉의 오랜기간 음악감독인 탕무하이 초청으로 텐진오페라, 텐진오케 스트라와 오페라 3편을 함께 작업을 했습니다. 오페라 까발레 리아 루스티까나, 투란도트 이 두편은 주역으로, 라트라비아타는 중국내 최고의 라이징스타들과 성악을 지도하는 고문가수로 스텝으로서 참여하였습니다. 비올렛타로 함께 작업했던 소프라노가수가 최근에 저희학교에 교수로 임명을 받는 보람도 있었는데 최근 중국신예성악가들의 활약이 전세계적으로 두들어지는 바 그 현주소를 알아볼 수 있는 귀한 계기였습니다. 또한 중국문부성이 주최하고 텐진필하모닉과 함께한 <로씨니 150주년기념콘서트>에 유일한 외국인가수로 초청되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로시니의 오텔로와 베르디의 오텔로에 나오는 두 개의 데즈데모나 아리아를 불러서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중앙민족대학교 제자들과 함께-

중앙음악학원(CCOM)의 유펑총장님과는 중국에서 풀타임 교수생활을 막 시작한 201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린츠국제콩쿨 심사위원으로서 만나서 친분을 이어오다가 작년 여름 제게 급한 콜을 한다며 당장 내일 미팅을 하자는 위쳇(Wechat)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총장으로 있는 중앙음악학원에서 함께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서 학교측으로부터 특채임용을 받게되었 습니다. 중요한 인터뷰를 거의 두시간 가까이 질의-답변 을 했는데 총장은 전혀 영어를 못하시고 저는 중국어를 전혀 못하니 우리쪽 통역사, 학교측의 통역사 그리고 저와 총장님이 큰 회의실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국기를 앞에 두고서 앉아서 마치 외교회의장 같은 분위기의 인터뷰를 했었던 것이 참 인상 깊었습 니다. 위펑총장은 자신의 학교를 이끌며 가지고 있는 이상과 비젼을 제시하면서 현재에 이미 시작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업에 대해서도 브리핑을 해주었습니다. 

-중앙민족대학교 제자들과 함께-


저도 이제까지의  “교육자”  또한 교육자 이전의 ”예술가“ 로서의 평생경험을 토대로 마치 열정적인 강의를 하듯이 토론해나갔습니다. 저도 참 어떻게 그렇게 강하게 열정적으로 제 생각을 털어놓게 되었는지 모를 지경이였습니다. 제 인생에 당연 손꼽을 수 있을만한 참으로 귀한 경험의 자리이자 멋진 순간이였습니다. 그 이후 저의 노래음원과 동영상을 보내드리고 전격적으로 올해 초 임용이 결정이 났고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 학교뿐만 아니라 중국 최고의 음악대학(음악학원) 들의 초청도 많이 받고 있어서 후학들을 양성할 기회가 많이 있었기에 보람있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스테이지 :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오페라 가수로써 또 전문 성악인 으로 수많은 연주를 하셨는데 요즘 특별히 한국가곡연주에서 많이 뵐 수있게 되는 것 같아 한국가곡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수님의 한국가곡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신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또 그간의 선생님의 음악인생의 발자취를 좀 이야기해주세요?

김인혜 :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곡을 사랑하는 것이 한국인 성악가로서 너무나 당연하다고 하겠지요. 워낙 어려서부터 배우고 불렀던 것들이 우리노래들, 동요,가곡들 이였기에 그런것 같습니다. -중국최고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1988년 줄리어드 박사과정중에 카네기홀에서 헨델의 <메시야> 를 불러 “Best of all was Inhye Kim ... " 라는 호평이 뉴욕타임즈 리뷰란에 실린 것이 저의 첫 번째 외국곡 데뷰 무대였고요 미국 줄리어드에서 10년간 수학후 귀국 하여 1994년 국립오페라단 의 <쟈니스끼끼>로 데뷔한 것이 제 첫 번째 오페라데뷰입니다. 당시 박성원 국립오페라단장님,  박은성 선생님의 지휘와 신경욱 연출선생님, 테너 김태현교수님, 강무림 선생님, 친구인 소프라노 최승혜등이 추억으로 생각이 나네요.  

물론 서울대학교 재학시절에도 오페라를 하긴 했네요.1982년에 휘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역을 맡았는데요 당시 조수경(조수미) 선생이 서울대 한해 후배였는데 수잔나를 불렀고 역시 한 해 후배 고성현선생이 백작역이였어요. 제 인생의 첫 오페라인 <휘가로> 이후 40년동안 51편의 오페라의 주역을 맡아서 공연을 했고요. 2개국도 넘는 여러나라에서 오페라, 콘서트 등에 참여하여 세계적인 악단과 연주단체, 연주자들과 협연하며 수천회 이상 연주무대를 가졌습니다. 기억컨대 참으로 열심히 살아온 멋지고도 감사한 음악인생이였다고 자부합니다.


미국 줄리어드에서 아시아인으로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고서 귀국하여 1994년부터 숙명여대에서 4년, 신설된 인제대학교 음악과의 고문교수로 7년,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14년간 총25년간 교수생활도 했습니다. 제 욕심껏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또 서울대를 나와 어두운 터널같은 생활도 해봤습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고 어둡고 영원히 풀릴 것 같지 않은 미로에 갇힌 끝없는 나락이였습니다. 늘 제 방 컴퓨터에 앉아서 창문 밖을 내다보며 ‘여기서 저기로 떨어진다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끝날텐데...’ 란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러나 딱 두가지가 저를 붙잡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편이다 하는 단순한 생각과 내편 인게 또하나 있더라고요 바로 음악이였습니다. 이 두가지가 제게 다시 온전한 영혼을 찾게 해주었습니다. 

사실 저는 굉장히 단순무식(?)해서요 마음에 또 정신에 결정이 떡~ 하고 정해지면 아주 심플해집니다. 걱정이나 의심같은 거 별로 안하고요. 제가 태어나고부터 거의 다른 일을 해본적도 없고 그저 노래하고 노래하고 노래했던 인생이였기에 실은 다시 정신을 차리는 것도 쉽더라고요. 정말 노래를 많이 불렀고 또 수많은 제자들을 길렀습니다. 최근에도 오펜바흐의 <호프만의 이야기>, 챠이코프스키 작곡의 <에프게니아녜긴>을 연주했고요 창작가곡등은 지금도 작곡자, 작시자들이 많이 보내주시거든요.

-테너 마르티누치와-


계속 공부하고 연습하고 노래합니다. 너무 멋지쟎아요.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서울대교수시절에도 저의 아이디는 늘 소프라노 김인혜였습니다. 교수김인혜가 아니였던거죠. 또 저의 장점이자 단점중 하나가 절대 지치거나 포기해지질 않아요. 저의 음악인생 에 대하여서도 물론 그렇지만 제가 기르는 제자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포기가 않되서 문제예요. 예네들이 재능이 있는데,  실력이 올라갈 수 있는데, 글로벌 스탠다드로 얼마든지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설 수 있는데.. 그래서 제가 제자들을 좀 세게 푸쉬를 해 왔던 것도 사실 있습니다. 중국에 와서는 제자들과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합니다. 뭐가 힘드냐 뭐가 문제냐 뭐가 고민이냐 ... 밤에도 찾아오는 제자들이 있어요. 밤늦도록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처음에 정말 쉽지않았죠. 그래도 어쨌든 그렇게 노력하고 시간을 들이다보니 스스로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는 제자들이 참 많습니다. 대부분 우리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서울-북경간의 거리보다도 몇배나 먼거리에서 유학(?)을 온 친구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애기때부터 피아노,  성악등에 두각을 나타내어 거의 천재소리를 듣고 살아온 아이들 인거죠. 문제도 많고 고민도 많은데 모든 것이 자신이 과연 스타가 될 것인가에 올인하고있습니다. 저는 제 최선을 다하며 가르치지만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니 전 매일 기도하면서 돕고 있습니다.

2011년에 서울대를 나와 한국과 중국을 부지런히 오가며 가르치고 기른 제자가 서울대재직중에 배출한 제자의 한 100배 는 되나 봐요..ㅎ 텐진음악학원에 초청강사로 일주일동안 마스터클래스를 했었는데 거의 200명 가까이 학생, 교수들를 지도했더라고요. 제가 가끔 엄청난 식욕때문에 이러다가는 먹다가 죽겠다~ 고 생각한 적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는 이러다 가는 가르치다가 죽겠다~ ㅋ 물론 농담이지만...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테너 호세쿠라와-


저는 1967년 창설된 KBS애기노래회 출신입니다. 그 때가 만 5살때였는데 매주 라디오방송프로그람, 텔레비전프로그람 등에 출연했어요. 그 때 제 인생 처음으로 배우고 연주한 곡들이 참 멋졌습니다. “바람이 서늘도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이수인선생님의 <별>, “우리아기 착한 아기 소록소록 잠들라 하늘나라 아기별도 곱게곱게 잠든다..” 김대현작곡의 <자장가> 같은 곡들이였습니다. 이런 멋진 곡을 배우고 노래하고 연주도 하였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유아기때부터 우리곡, 우리가곡들을 접하면서 아주 자연스러운 가곡사랑과 그리움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저의 음악인생열정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평생을 불러온 셈인데요 아직도 신작가곡을 처음 오선지로 대할 때면 가슴이 뛰고 무엇인가가 뭉클하게 끓어 오르는게 그렇게 사무치고, 그립고, 제 인생의 한 컷, 한 장면이 떠올려지는 그런 신비로운 장르인 우리가곡입니다. 제가 음반녹음을 1997년에 처음으로 장일남 선생님과 아카데미오케스트라협연으로 벽제 지구레코드사 녹음실에서 한 김인혜가곡집 “그리움이하나되어“ 입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진땀이 나는 작업이였는데요. 장일남 선생님꼐서 여러 가지 조언도 해주시고 사모님께서도 녹음실 까지 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해주셨던 것이 기억이 나네요. 그 때부터 수많은 작곡, 작시자 선생님들과 함께 영감으로 예술혼 으로 오선지에 써내려간 그분들의 드높은 이상을 나만의 예술로 나만의 노래로 나만의 시어로 재창조하는 가수가 되어 ‘표현’하고  ‘완성’해나가는 일을 수없이 반복 또 반복해 왔습니다. 물론 제가 생각해도 참 멋지게 완성한 곡이 있는가 하면 또 참 실망스럽게 불렀던 적도 물론 있었습니다.

-소프라노 쉐릴스튜더와-


올해는 제 성악가 인생 40주년입니다. 평생 사랑했고 노래했던 또 아직도 노래하며 사랑앓이를 하고있는 우리가곡을 한 앨범에 묶어서 <김인혜한국가곡대전집> 타이틀로 발매 할 예정입니다.  작곡자, 작시자를 다 합쳐보니 한 160분쯤 되고 총 곡수가 200 여곡 이 됩니다. 지난 6년간 작곡자 작사자선생님들께 일일이 연락을 드리고 허락을 받고 수정작업등을 거쳐서 10개의  CD전집으로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년간 언제나 제 편에서 사랑과 영감을 아낌없이 주셨던 최영섭작곡가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최근에 건강이 안좋아지셨는데 속히 회복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스테이지 : 공연에서 보여주시는 교수님의 에너지가 대단함을 항상 느꼈습니다. 관객에게 많은 공감을 얻게 하는 소프라노 김인혜만 의 비법이 있으실까요? 저희 스테이지 구독자들께 살짝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인혜 : 비법이요? 글쎄요..저의 육중한 체중에서 나오는 에너지 아닐까요...ㅎ

 앞서서도 말씀을 드렸듯이 저는 유아기부터 연주생활을 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만 5세때부터 방송국에서 노래를 배우고 연습하고 연주하여 녹화하고 또 방송프로그람을 만들었 습니다. 그 때 이후로 방송국 연주장 등에서 만났던 수많은 작곡가, 지휘자선생님들; 장일남선생님, 홍연택선생님, 임원식선생님, 이수인선생님, 최영섭선생님... KBS관현악단 초대감독 이셨던 김강섭선생님도 당시 저의 선생님이셨으니까요. 참 많은 분들께 배웠네요!

전 그 어떤 예술쟝르도 연주자라면 단 한가지에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Expression” 바로‘표현’ 입니다. 이 작품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 작품을 가지고 나의 예술세계를 통하여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나는 나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끊임없는 의문과 해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겠죠. 그것은 굉장한 고통(준비하는 것)이자 기쁨(무대연주와 관객소통)입니다. 지나온 음악인생에서 배운 것 중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전 늘상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너와 관객의 거리라고요. 큰 요단강(죽어야만 건넌다는) 이 흐른다고요. 내가 노래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엄청난 장애물을 건너서 관객에게 전달이 되어야만 시詩, 노래고 예술이라고 가르칩니다. 바로 그것이 가수로서 제가 가장 노력해왔던 점이기 때문입니다.



스테이지 : 현재 중국 북경중앙음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시며 그들을 지도하면서 특별히 느끼는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인혜 : 오랜기간 적어도 수천년간 한국과 중국은 여러면에서 교통하고 소통해왔습니다. 우리의 문화와 매우 흡사한 것과 특이할 정도로 다른 문화차이가 있는 것이 참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졌 습니다. 다른 전공분야도 마찬가지 일테지만 자신이 전공하는 은사에게 최선을 다해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가짐(태도)은 누구나 있을 것인데 우리나라 학생들 보다 훨씬 더 솔직하고 훨씬 더 적극적인 것 같습니다. 물론 태도는 정말 ‘태도‘이죠. 뭐라 확실히 보이거나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인간대 인간으로 보여지고 느껴지는 것은 국경을 초월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또한 자기를 솔직하게 표현하고 바로 앞에서도 가감없이 토론하고 평가 해주는 데에 절대 주저하지 않습니다. 전 처음에는 조금 난감하더라고요. 학생들이 너무나 적극적으로 발표하고 토론하고 평가를 하는데 ‘헉’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교수들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테너 요나스카우프만과-


이것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텐진음악대학에 여러번 초청되어 공개강의수업을 하는데 첫날은 학생들이 한명씩 강당에 올라와 공개레슨을 하였습니다. 성악과 학생만 아마도 한 천명쯤 되니까 거의 한 5분~10분 간격으로 짧게 레슨을 주고 있었는데요 점심시간 이후쯤 되니까 나이가 많은 분들이 레슨해달라고 무대위로 올라와요. 몇학년 학생이냐고 물어보니 자신은 강사인데 제가 가르치는 것을 보고서 자신도 배우려고 올라왔다는거예요. 제가 통역을 맡은 방춘월교수(텐진음대교수) 에게 살짝 물었죠 “아무래도 좀 그렇쟌냐...학생들이 다 아래서 보고있는데 괜챤겠냐..? ” 그랬더니 정말 배우고자 올라온 교수이니 배워주면 된다는 거예요. 저는 그 이후로 3일간 거의 강사, 교수들만 지도하였습니다. 왜냐면 성악과의 교수숫자만 100명 이 넘었거든요. 워낙 적극적으로 교수님들이 조언을 구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누가 보든 누가 듣든 제자들이 앞에 있든 어쨌든 자신이 배우고자 하면 누구에게도 오픈하고 배웁니다. 마지막날에는 텐진음악학원 교수님 10여분과 함께 큰 공연도 함께 가졌는데 칭찬도 진짜 두고두고 엄청 많이 받았습니다.


최근에 만나는 후배음악가들이 중국의 교육계에 대한 궁금증이 많더라고요. 잠시 소개하자면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식 명칭이며 물론 세계적으로 국가면적은 아마도 러시아가 제일 크겠지만 중국은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입니다. 90%이상이 한족이며 기타55개 소수민족으로 형성되었죠. 북경을 비롯한 4개의 직할시와 23개 성省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북한과는  1949년에 우리나라와는 1992년에 수교가 이루어졌습니다.

중국전역에서 음악영재 음악인재들을 양성하도록 건립한 음악학원 (콘서바토리개념) 이 총11개가 있으며 각 음악학원의 학생수가 넘청나게 많습니다. 일례로 스촨음악학원은 규모가 크기로 유명한데 성악과 1년 학생만 천명이 넘고 성악과 교수만 300명이 넘습니다. 전체 음악학원의 학생수가 어림잡아 도 수만명은 될테니 진짜 엄청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기회를 잡아야 하는 것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설 수 밖에 없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이미 몸에 배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각성과 각도시마다 수백 수천의 대학, 음악대학 및 음악과 가 있습니다.

북경은 인구가 서울의 20배크기라고 해요. 지리적으로는  100배가 크고요. 현재 중국의 수도인 만큼 (1279년 원나라가 수도로 삼으면서 지난 700년 이상 중국의 수도였음) 2개의 음악학원(잉예쉐이옌) 과 백여개의 음악대학 및 음악학교가 있습니다.

-체코공화국 라츨라프대통령과-


펑리위안 (영부인)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북경중국 음악학원(쭝궈잉예쉐이옌)과 1949년 마오쩌뚱이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이후 그 이듬해인 1950년 개교한 중국최고의 음악원이며 랑랑, 탄둔, 유자왕등을 배출한 중앙음악 학원이 있습니다.

올해 초 저는 이 중앙음악학원에 정교수로 임용이 받았습니다.  임용청빙서에 쓰인 학교인사과장인 양커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찡링후이 교수님! 당신은 최고의 아티스트로서 최고의 교수로서 활약한 지난 수십년간의 업적을 우리학교에서 잘 파악하고 이해 하였습니다. 당신을 알게되고 모시는 것이 우리학교의 큰 영광입니다. 지금껏 우리가 모셨던 그 어떤 예술가보다 최고의 대우로 정교수의 직책으로 임용하기를 원합니다.” 참으로 감사한 순간이였습니다.

저희학교 중앙음악학원(Central Conservatoy Of Music)은 중국최고의 지휘자이자 지난 수십년간 북경대가극원(NCPA)의 오페라단의 음악감독이었던 유펑박사가 총장으로서 이끌고있는 음악원으로서 중국내에서 유일하게 중국중앙정부가 직접 관리하고 있는 단 하나의 학교입니다. 수천년간 왕궁지역으로 알려진 북경시내의 가장 중심구인 시청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저는 학교내 호텔 맨꼭대기 층의 서비스아파트에서 지내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중국내 최고의 음악학원, 음악대학등에서도 초청 연주와 초청강의도 하고있어요. 텐진음악학원,  시안음악학원 , 저장음악학원, 원쪼우음악학원, 북경중국음악학원 등에서 초청강의교수, 자문교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 와중에 2017년 제 8회 베이징국제오페라성악콩쿨에서는 제가 지도한  7팀이 모두 입상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콩쿨위원회로부터 <최우수지도자상>을 받기도 하였고 2018년에는 이태리 Sirmione 마리아칼라스추모위원회로부터 을 수상하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오늘까지 인도해주시고 은혜를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중앙음악학원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중국의 동료교수님들과 귀한 제자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스테이지 : 열정으로 중국과 한국을 오가시며 연주와 후학양성을 쏟으시는데 체력관리와 컨디션 조절은 어떻게 하시는지요?

김인혜 : 저는 예수님을 저의 구세주로 영접한 크리스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삽니다. 주일예배를 반드시 지키고요 매일 새벽 6시에는 새벽기도를 빼먹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명성교회 김삼환목사님과-


생활패턴은 아주 심플합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고요. 특히 발성연습(호흡운동포함)은 하루에 적어도 두,세시간 거르지 않고 합니다. 어쩌다가 하는 것이랑 매일 하는 것은 상당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는 코로나 사태로 북경에 못들어가고 한국에서 인터넷 강의 로 수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인터넷강의 포털이 매우 발전하여있습니다. 그 중 두개의 포털에서 저의 개인 렉쳐 인강도 하고있습니다. 펜데믹 이전인 작년 9월부터 시작한 인터넷강의 에 제 수업을 들었던 수강생의 연인원이 거의 20만명 에 육박할 정도로 열심히 작업하고있고 아주 재미있기도 합니다. 매주 학교 수업을 포함해서 인강을 적어도 30시간 이상 하는 것 같아요. 코로나사태로 교육도 참 희한하게 진화하여 모든 소통과 교육 사업이 전부 인터넷 플렛폼화 되어가는 현실이 닥쳐온 것입니다. 이 분야도 신속한 연구와 대응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최근까지도 녹음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곡을 고르고 새로운 감성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저의 평생의 음원을 관리하고 리코딩작업도 함께 해주시는 드림쉐어의 남인호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스테이지 :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최초 클래식 스마트 음악잡지 “박경준의 스테이지”에 응원의 메시지 부탁드립니다.

김인혜 : “박경준의 스테이지“ 는 보석입니다. 현실에서 바라보는 우리는 전세계적인 바이러스 펜데믹과 경제위기 그리고 인구절벽이란 절체절명의 위기속에 있습니다. 음악과 예술, 노래와 가수,  사람과 인생, 그 모두를 진심으로 성실하게 다루고 가감없이 보여주는 ‘박경준의 스테이지’는 앞으로 더욱 더 우리모두에게 필요한 매체로서 그 위상을 높이 보여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나라 음악계를 이끌어온 훌륭한 아티스트로서 더 멋진 비젼의 주인공으로 많은 분들께 커다란 영감과 감동으로 리드해주실 박경준선생님께도 축하와 축복을 보냅니다! ‘박경준의 스테이지‘ 1주년을 다시금 축하드리고  이 멋진 온라인의 지면을 통해 저의 작고 부족한 음악인생나눔이 더욱 크고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인터뷰
발행인 박경준
buon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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