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썸남 박경준의 오페라 산책 : 토스카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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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쫓겨난 아이의 극적반전

[토스카]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는 베르디보다 45년 늦게
이탈리아의 중부 토스카나 지방에 위치한 아름다운 문화도시 루카에서 5대를 걸쳐 음악적 배경을 가진 집안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1858년 12월 22일 태어난 이탈리아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푸치니의 아버지 미켈레는 나폴리에서 도니체티를 사사한 작곡가이자 음악학교 교사로 활동 하였으며, 할아버지 도메니코도 작곡가 파이지엘로 문하에서 오페라를 배운 음악가 집안이었다. 푸치니의 어머니 알비나는 아들을 성공시키겠다는 불굴의 의지로 본인의 능력이 허락하는 대로 정성을 쏟아부었다. 가족 중에 오르가니스트나 합창단 지휘자 등 음악가가 여럿이 있기에 재능이 있으리라 생각했던것이다. 그러나 푸치니는 음악공부에 필요한 열의도 끈기도 부족한 학생이었다.

푸치니 누이 라멜데의 말을 인용하면 어떤 종류의 공부에도 흥미를 붙이지 못했으며, 하물며 학교에서 몇 차례나 쫓겨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 알비나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평범했던 푸치니는 아버지의 제자였던 카를로 안젤로니 (Carlo Angeloni)의 지도로 받아 서서히 음악적인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결과 10살 무렵에는 성 마르티노 성당의 합창단 단장과 오르간 주자를 맡아 일찍부터 현장 음악가로의 경험을 쌓았다. 합창단 단장의 직위는 푸치니 가문에서 대대로 맡았던 직위였다. 어머니의 헌신과 주위의 도움으로 16세 때는 오르간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돕기 위해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돈을 벌기도 하였다.

그다음 해부터 작곡을 시작한 푸치니는 원래는 교회 음악에 뜻을 두고 작곡을 했지만 1876년 3월 11일 푸치니는 친구 두 명과 함께 피사까지 20km를 걸어가서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최고 거장인 베르디의 [아이다 (Aida)] 공연을 보고 오페라의 매력에 푹 빠진 푸치니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꿔 오페라 작곡가의 길로 들어섰다.
훗날 그는 “피사에서 [아이다 (Aida)]를 듣던 중 내 앞에 음악의 길이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루카의 파치니 음악학교 졸업 후 가난한 푸치니는 다행히도 마르게르타 왕후에게 편지를 띄워 1년간 학비와 생활비 일체를 약속받았고, 나머지는 의사로 일하던 삼촌 니콜라우스가 해결해 줘서, 1880년 22세 때 음악인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밀라노 음악학원에 입학하여 파치니와 폰키엘리로부터 사사했는데 졸업 전부터 이미 오페라에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의 편지 등으로 추측하면, 이 시대 그의 가난했던 생활로 자유분방한 동료였던 마스카니와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어렵게 공부를 이어갔고 1883년 26세에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하게 된다. 이때의 경험이 가난한 보헤미안들의 사랑이야기인 푸치니의 최고의 명작인 [라 보엠(La Boheme)]의 탄생 배경이 되기도 한다.

※ 참 아이러니하게도 ‘밀라노 국립 음악원’은 후대에 ‘베르디 음악원’이라 불리는데 정작 베르디 본인은 피아노 시험에서 손의 운지법이 나쁘다는 이유로 입학을 하지 못했다.

푸치니는 실제로 졸업 이전부터 스승 아밀카레 폰키엘리 추천으로 밀라노의 출판사 ‘손초뇨’ 의 콩쿠르에 작품을 제출하도록 하여 그의 나이 26세 때 처음으로 오페라 [요정 빌리
(Le Villi)]를 만들었는데 콩쿠르에서는 떨어졌지만, 스승 폰키엘리와 폰타나에 의해 사교 모임에서 아리고 보이토(오페라 ‘메피스토펠레’ 의 작곡자 및 베르디 ‘오텔로’ 의 대본 집필자로 유명)와 음악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리코르디 출판사 사장 줄리오 리코르디의 관심을 받게 되고, 폰키엘리의 추천과 도움으로 드디어 1884년 5월 밀라노의 ‘달 메르메‘ 극장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된다.
결과는 대성공이어서 리코르디 출판사와 다음 작품의 계약을 하게 된다.
[요정 빌리 (Billy)] 이후 그 이듬해에는 두 번째 작품 [에드가 (Edga)]를 작곡하던 중 어머니와 동생이 죽는 불행이 닥쳐서 5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1889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지만 완전 실패로 끝났다.

그러던 중 1893년 드디어 푸치니의 명성을 높여주는 작품이 나오는데 바로 프랑스의 작가 아베 프레보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마농 레스코 (Manon Lescaut)]라는 작품이고 이 오페라의 성공은 푸치니에게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지위와 명성을 얻게 된다.
1895년의 초연은 대성공이어서 이 한 작품으로 푸치니는 비약적인 진보를 보였다. 당시 그의 나이 38세로 일류 작곡가로서는 결코 빠르다고 할 수 없지만 푸치니는 그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에는 푸치니의 3대 오페라로 불리는 [라 보엠 (La Boheme)](1896), [토스카 (La
Tosca)] (1900), 그리고 [나비부인 (Madama Butterfly)] (1904) 등의 명곡으로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의 명성을 얻게 된다. 대체로 푸치니는 대본 작자에 대한 요구가 매우 엄격하고 참견이 많았는데, 일리카와 자코사를 협력자로 해서 작곡된 다른 두 작품, [토스카 (La
Tosca)]와 [나비부인 (Madama Butterfly)]의 성공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든 1907년 1월 9일 [나비부인 (Madama Butterfly)]의 미국 초연과 ‘푸치니 시즌’ 일정에 참가하기 위해서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이 여행이 푸치니에게 새로운 작품으로 인도하였다. 이 여행 중 그는 벨라스코의 연극 3편을 연달아 감상했는데 그 중 ‘황금빛 서부의 아가씨’에 매료되어서 희곡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여 차기작으로 확정했다. 다만 푸치니 3부작의 대본을 맡은 일리카가 아닌 이탈리아 신예 문인인 카를로 찬카리니의 대본으로 오페라 작곡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몇 달이 흘러도 대본이 완성되지 않자 구엘포 치비니니가 다시 대본을 맡게 되어 [서부의 아가씨 (La Fanciulla del West)] 라는 제목으로 1910년 12월 10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초연했다.

희가극 풍 작품 [제비 (La Rondine)] 는 제1차 대전에 참전을 선언한 이탈리아의 경제 상황과 특히 적국출신의 요재피내 폰 슈팅앨과의 염문설과 적국의 오페라 극장과의 계약으로 푸치니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3부작 (Il Trittico)]를 작곡하였는데, 이 3부작중 제 1편 [외투 (Il Tabarro)]에 착수하고 있었다. 인간의 정욕을 사실적으로 그린 이 작품과, 종교적 감상비극이며 특이하게도 남성 등장인물이 전혀 없는 제 2편 [수녀 안젤리카 (Suor Angelica)], 그리고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을 다뤄 인간의 금전욕에 대한 풍자 희극인 제 3편 [잔니 스키키 (Gianni Schicchi)]는 1918년 뉴욕에서 초연되었는데. [잔니 스키키]는 특히 인기를 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오페라 [제비]나 [3부작] 같은 공연이 전시에 초연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만약 이 오페라들도 평상시에 초연되었더라면 많은 인기를 누렸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푸치니는 매력적이고 잘생긴 외모로 인해서 늘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고, 유럽을 넘어 전 세계에 오페라의 거장으로 우뚝 서게 된다.

마지막 작품으로 미완성인 오페라 [투란도트(Turandot)] 를 작곡 중 제 1막 작곡도 끝내놓고 대본도 차질 없이 확보된 터라 오스트리아와 독일, 네덜란드와 스위스에 자동차여행을 떠난다. 즐거운 여정을 기대하지만 식사 도중에 음식 뼈가 목에 걸리고 말았는데 수술이 아니고서는 꺼낼 방도가 없었다. 그를 죽음을 몰고 간 인후 종양은 아마도 이 자동차여행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또한 푸치니는 살아생전 워낙 골초여서 인두의 악성 종양이 요즘의 후두암으로 발전한 것인지 어쨌든 이 두 가지 요소가 푸치니의 건강을 급격히 악화시킨다.

[투란도트 (Turandot)]를 완성하려고 많은 노력을 한 푸치니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결국 [투란도트]의 끝을 맺지 못한 채 11월 24일 푸치니는 성공적인 수술을 받았으나 그의 심장이 견뎌내지 못해 1924년 11월 29일 브뤼셀에서 심장마비로 향년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래서 이 오페라의 마지막 부분은 그의 제자였던 프랑코 알파노(Franco Alfano)가 마무리를 하게 된다.

푸치니가 죽은 지 2년 뒤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무대에 올려진 [투란도트]는 관객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검은 복장을 하고 공연을 봤고 당시 생전에 푸치니와 친교가 있던 명지휘자였던 토스카니니가 한창 열성적으로 오페라를 지휘하던 중 작곡자의 검필 부분에서 토스카니니는 갑자기 관객들을 향해 뒤돌아서서 “마에스트로가 쓴 오페라는 여기까지입니다.”라고 관객들을 향해 정중히 선언한 후 지휘봉을 놓고 무대에서 내려갔다.
관객들도 마에스트로 푸치니의 죽음을 다시 한 번 애도하며 극장을 떠나게 되는데 이 일은 오페라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일화로 유명하다.



글 발행인 박경준
buon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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